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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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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온 3세는 8세기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였다. 튀르키예 지역에서 태어나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지원을 받아 고위직에 올랐고, 아나톨리콘 테마의 사령관으로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 717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이슬람 군대를 격퇴하여 명성을 얻었으나, 성상 파괴 운동을 일으켜 서방 교회와 갈등을 빚었다. 말년에는 이슬람의 침략이 있었으며, 741년 사망 후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가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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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3세
기본 정보
레온 3세와 콘스탄티노스 5세의 솔리두스
레온 3세와 콘스탄티노스 5세의 솔리두스
이름레온 3세
로마자 표기Le-on sam-se
그리스어Λέων Γ' ο Ίσαυρος
로마자 표기Le-on se-me o I-sau-ros
통치 정보
재위 기간717년 - 741년
이전 통치자테오도시우스 3세
다음 통치자콘스탄티노스 5세
직책로마인의 황제
종교
종교동방 기독교 (성상파괴주의)

2. 생애

레온 3세는 콤마게네 왕국 게르마니키아(오늘날 튀르키예 카흐라만마라슈)의 평범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대규모 이주정책으로 어린 나이에 트라키아로 이주했다. 705년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복위할 때 양 500마리를 내주어 도와준 결과 고위직인 스파타리우스(''spatharius'')의 자리에 올랐고, 뛰어난 외교술로 동방에서 공을 세웠다. 715년 아나스타시우스 2세 치하에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테마인 아나톨리콘의 사령관(스트라테고스)이 되었다.

717년 여름 마슬라마가 이끄는 8만 명의 아랍 대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자, 레온은 즉위 직후부터 이슬람의 침공에 대비하여 이를 잘 막아내었다. 이슬람군은 1년 동안 육상과 해상을 포위하여 공격했으나 난공불락의 성은 결코 함락되지 않았다. 해전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의 유명한 그리스 화약으로 이슬람 함대를 공격했고,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혹독한 겨울 추위는 포위군을 괴롭혔다.[1] 결국 아랍군은 포위를 풀었고, 레온 3세는 공성전 승리로 훌륭한 황제라는 평을 얻었다.[1]

레온 3세는 722년, 유대인몬타누스파에게 세례를 강요했다.[1] 또한 성상 파괴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이슬람교의 영향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레온 3세를 반대하는 측의 주장일 가능성이 크다.[1] 726년부터 성화 사용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한 레온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칼케의 청동 대문의 성상을 파괴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성상 파괴 명령을 내렸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이에 반발하였고, 라벤나에서 주민들의 무장 봉기를 부추겼다. 교황 그레고리오 3세도 성상 파괴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731년, 레온 3세는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 교회에서 나오는 연간 수입을 모두 몰수했고, 교황은 성상에 손을 대는 자는 모두 파문하겠다고 맞섰다. 레온은 발칸반도와 남부 이탈리아의 여러 교구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관할 아래에 두었다.

레온 3세의 말년에는 이슬람 세력이 소아시아를 몇 차례 침범했다. 레온의 치세 초기,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훌륭히 방어하고 침략을 물리친 업적은 성상파괴운동으로 촉발된 동서 교회 분열과 종교분쟁으로 그 빛이 많이 가려지게 되었다. 741년 6월 18일 레온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죽었고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가 제위를 계승했다.

2. 1. 어린 시절

레온 3세는 콤마게네 왕국 게르마니키아(오늘날 튀르키예 카흐라만마라슈)의 평범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대규모 이주정책으로 어린 나이에 트라키아로 이주했다. 705년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복위할 때 양 500마리를 내주어 도와준 결과 고위직인 스파타리우스(''spatharius'')의 자리에 올랐고, 뛰어난 외교술로 동방에서 공을 세웠다. 715년 아나스타시우스 2세 치하에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테마인 아나톨리콘의 사령관(스트라테고스)이 되었다. 이때 아랍 제국과의 성공적인 외교로 그들의 침입을 저지했는데, 사라센의 지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있다.

2. 2. 수도 방어

717년 여름 마슬라마가 이끄는 8만 명의 아랍 대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레온은 이미 제위에 오른 직후부터 이슬람의 침공에 대비하여 이를 잘 막아내었다. 이슬람군은 1년 동안 육상과 해상을 포위하여 공격했으나 난공불락의 성은 결코 함락되지 않았다. 해전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의 유명한 그리스 화약으로 이슬람 함대를 공격했고,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혹독한 겨울 추위는 포위군을 괴롭혔다.[1] 급기야 일부 아랍 함대가 전선에서 이탈하고 트라키아에 주둔한 이슬람군을 불가르족이 공격해오자 아랍군은 포위를 풀어야만 했다.[1] 용의주도한 레온 3세의 공성전 승리로 아랍인들은 유럽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되었고, 레온 3세는 훌륭한 황제라는 평을 얻었다.[1]

2. 3. 제1차 성상 파괴 운동

레온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어로 높아진 인기를 바탕으로 자신의 종교적 관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722년, 유대인몬타누스파에게 세례를 강요했다.[1] 그의 통치 기간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성상 파괴 정책이었다. 이 정책이 이슬람교의 영향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레온 3세를 반대하는 측의 주장일 가능성이 크다. 성상 파괴는 그리스도 합성론(예수의 인격과 신격이 혼합되었다는 주장으로, 단성설 참조. 단성론은 아리우스파로, 이단으로 배격되었다)과 관련이 있다.[1]

레온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당시나 그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성상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725년, 성상 파괴를 주장하는 주교들이 황제에게 의견을 올렸고, 이에 영향을 받은 황제는 726년부터 성화 사용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레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칼케의 청동 대문의 성상을 파괴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성상 파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서방 지역에서는 성상 파괴를 신성모독으로 간주하여 이에 반발하는 대규모 반대가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레온 3세의 이러한 움직임에 즉각 반발하고 라벤나에서 주민들의 무장 봉기를 부추겼다. 상황이 악화되었음에도 레온 3세는 성상 파괴령을 철회하지 않았고, 오히려 군대를 보내 교황을 체포하려 했으나 그레고리오 2세는 병사들에게 체포되기 전에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교황 그레고리오 3세도 전임 교황과 마찬가지로 성상 파괴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731년, 레온 3세는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 교회에서 나오는 연간 수입을 모두 몰수했고, 교황은 성상에 손을 대는 자는 모두 파문하겠다고 맞섰다. 이에 자극받은 레온은 발칸반도와 남부 이탈리아의 여러 교구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관할 아래에 두었다.

2. 4. 말년과 죽음

레온 3세의 말년에 대하여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이슬람 세력이 소아시아를 몇 차례 침범했고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레온의 치세 초기,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훌륭히 방어하고 침략을 물리친 업적은 성상파괴운동으로 촉발된 동서 교회 분열과 종교분쟁으로 그 빛이 많이 가려지게 되었다. 741년 6월 18일 레온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죽었고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가 제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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